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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 교향곡 06번 c minor Op.58 -3악장 지휘: 니콜라이 골로바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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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상한나라 작성일16-02-09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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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azunov - Symphony No.6 in c minor Op.58

니콜라이 골로바노프 (지휘)
모스크바 라디오 심포니

Nikolai Golovanov (Conductor)
Moscow Radio Symphony

1952 Mono
Moscow

Alexander Glazunov(1865~1936)

 

* Alexander Glazunov[Александр Стефанович Глазунов] *
작곡자, 지휘자 및 교육자.
부유하고 잘나가는 출판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글라주노프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10대가 되기도 전에
개인 피아노 레슨과 작곡 공부를 받게 되었다.

 

1879년에 발라끼레프를 만난 후 그는 림스끼-꼬르사꼬프에게서의
개인적인 작곡 레슨을 받으며 날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것은 1882년 겨우 그가 16세 되던 해에 상뜨 뻬쩨르부르그
에서 그의 첫 교향곡이 대단한 갈채를 받으며 연주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곧 부유한 상인이었던 벨랴예프는 글라주노프를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되었고 그의 작품들을 출간하고 또한 연주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그의 이력을 쌓아주기 시작하였다.

 

글라주노프는 진보적인 벨랴예프 써클의 일원이 되어 이 후원자의
집에서 열리는 음악의 "금요일"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1883년에 글라주노프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자신의 주된 관심사인 음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1884년 벨랴예프와 함께 바이마르로 가서 리스트를 만난 후,
글라주노프는 1887년에 니꼴라이 림스끼-꼬르사꼬프와 더불어
보로진의 작품들을 편집, 완성하는데 매달렸으며,
여기에는 미완성의 오페라 "이고리 공" 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 글라주노프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어 파리와 런던 등에서
자신의 음악을 지휘해왔으며, 1899년에는 여러 개의 4중주곡과
시곡들, 교향곡들, 그리고 그의 세 편의 발레곡인 "라이몬다",
"사랑의 계략" 및  "사계(四季)" 를 작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뜨 뻬쩨르부르그 음악원의 작곡 및 관현악과 교직을 내락받게
되었으며, 소요사태 중에 림스끼-꼬르사꼬프가 쫓겨남에 따라
일시적으로 동조 사직을 하였다가 1905년에는 교장이 되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대다수의 성숙기 작품들을 썼으며,
여기에는 8번 교향곡과 바이얼린 협주곡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파리와 런던에서 계속적으로 국제적인 공연에 참가해왔으며,
1907년에는 캠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새로운 소비예뜨 정책 아래서 글라주노프의 활동 가운데는
국가적인 음악 조직에 참여하는 것과 전통적인 러시아 예술
음악을 초기 소비예뜨 음악가들에게 연결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1922년에 작곡가 데뷔 40주년을 맞아 소련 인민 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그가 음악원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많은 중요하고 지속적인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혁명 후에도 음악원의 명성이 올라가도록
하였지만, 자신의 작곡 분야에서의 활동은 현저하게 줄어들어
버렸다.
학교에서의 진보적 이념에 대한 그의 보수적인 대립은 있었지만,
마찰은 없었다.

 

그는 1928년에 소련을 떠나 맨먼저 비엔나에서의 슈베르트 탄신
100주년 행사에 참가하였고, 그런 다음에는 음악원으로 계속
복귀하지 않으면서 유럽과 미국까지 지휘를 하며 연주여행을
다녔지만,
음악원과는 계속 연락을 유지하면서 소비예뜨 음악 활동에
공헌을 해왔다.
결국 그는 파리에 정착하여 작곡을 계속하게 되었으며,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서 1936년에 사망하였다.

 

글라주노프는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작곡을 하였다.
그의 주된 영역인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이외에도 그는 발레,
극 부수음악, 교향시곡, 모음곡, 서곡, 협주곡, 합창곡, 가곡,
실내악곡들과 피아노 작품들을 썼다. 하지만 그의 스승이었던
니꼴라이 림스끼-꼬르사꼬프와는 달리 글라주노프는 자신의
가르침이 이어지는 세대에 영향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인
논문 등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생애 초기에는 러시아 국민주의 악파에 속해있었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이 단순한 민족주의적 의미를 넘어서서
자신의 조국에 있어서의 최고의 작곡 기법과 코스모폴리탄적인
유럽의 최상의 것들을 분명하고 완벽한 러시아적인 관현악법으로
결합을 시키기에 이르렀다.

 

    - A. Ho & D. Feofanov
      Biographical Dictionary of Russian
      Soviet Composers

 

 

 

제3번에서 제8번까지의 교향곡, 제3번에서 제5번까지의 현악4중주곡,
그 밖에 "발레 정경" 모음곡과 "중세에서" 등의 관현악곡, 바이올린
협주곡, 3개의 발레음악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이들 작품에서 그는 러시아적 성격을 기조로 하면서 유럽 음악의
전통적인 엄격한 형식성과 모든 민족의 음악양식을 흡수하여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다.
1900년부터 페테르스부르크음악원 교수를 지냈으나,
1905년의 혁명으로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음악원에서 추방당한
사건에 동조하여 사임했다.

 

그 시기에 혁명적 민중에 바치는 뜻으로 "볼가강의 뱃노래" 를
합창과 관현악으로 편곡했으며, 이 사건 수습을 위해 같은 해
가을에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원장으로 취임해 17년의 러시아혁명
뒤부터 28년까지 그 직책에 있었다.

 

주요작품으로 발레음악 "레이몬다(1898)" 와 "사계(1901)" 가
손꼽힌다.

 

글라주노프가 태어난 1865년 무렵에는 러시아의 음악계 역시
태동기를 지나고 있었다.
1856년부터 62년 사이에 발라끼레프를 중심으로 뀨이, 보로진,
무소르그스끼와 림스끼-꼬르사꼬프가 만나 서로를 격려하고 영감을
나누면서 러시아 민족주의의 음악들을 쓰기 시작할 때였으며,
186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을 가리켜 "발라끼레프 써클" 혹은
"힘찬 소수(могучая кучка)" 라 지칭하게 되었다.

 

한편, 루빈쉬쩨인 형제, 안똔과 니꼴라이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음악가들은 좀 더 서유럽, 특히 독일-오스트리아의 정통적인
음악작곡과 교육을 지향하여 1859년에 러시아 음악협회를 만들고
차이꼬프스끼와 같은 이들을 조련하기 시작하였다.

 

서로간의 반목으로 치닫던 그들의 관계는 차이코프스키가
"5인조" 를 방문하여 교류를 하기 시작하고, 특히 림스키
코르사코프와는 죽을 때까지 경쟁적 친구관계를 유지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음악에 있어서의 "러시아 전통" 이 성립되어가는
도상에 있었고, 그 시기에 글라주노프가 태어났다.
글라주노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이미 1782년에 모스크바에서
창립되어 오래된, 그리고 알아주는 출판사인,
"왕조(династия:The Dynasty)" 의 오너였으며, 대문호인
알렉산드르 푸쉬킨(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도 이 출판사를 통하여
자신의 대표작인 "예프게니 오네긴" 을 출판했다고 한다.

 

출판업 및 서점을 하는, 부유하고 지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미술이나 음악 쪽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하며,
개인적으로 발라끼레프에게 피아노와 음악 레슨을 받고 있던
글라주노프의 어머니는 그가 13세가 되자
발라키레프(Милий Валакирев)에게 인사를 시킨다.

 

글라주노프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발라끼레프는 5인조 가운데
가장 어리지만 가장 이론적으로 열심이고 열의에 가득 차 있던
해군 무관 니꼴라이 림스끼 코르사코프에게 그를 인도하였고,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가르침은 마치 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글라주노프에게 전해져서 마침내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그를 가리켜
"매일매일이 아니라 숫제 매시간 음악적으로 진보한다." 는 말을
털어놓게 만든다.

 

"...이 시즌(1879-80)동안 발라끼레프는 나에게 음악 이론
문하생들을 여럿 보내왔다...  우연찮게 한번은 발라끼레프가
14,5세 되는 고등학생인 사샤 글라주노프의 작품을 보내왔다.
그것은 관현악 총보로서, 유치한 형태로 씌여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재능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라끼레프는 그 아이를 나에게 인사시켜
주었고, 나의 밑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인 옐레나 빠블로브나 글라주노바에게 기초적인
음악 이론을 가르치면서 또한 어린 사샤에게도 음악을 가르쳤다.
그는 매력적인 소년이었으며, 아름다운 눈의 소유자였고,
매우 거칠게 피아노를 쳤었다...
화성학을 어느 정도 가르친 다음, 나는 직접 그에게 대위법을
가르쳤는데, 그는 여기에 열성적으로 달라붙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언제나 나에게 자신의 즉흥 연주를 들려주면서
단편이나 소품들을 써내려갔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위법과 작곡에 대한 공부는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그때 그는 특히 리스트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의 음악적인 발전은 나날이 느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시간마다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의 수업이 시작되고 난 이후로 사샤와의 관계는 단순히
아는 사이나 선생-문하생간의 관계가 아니라 점차 친구관계로
바뀌어 갔다.

 

나이의 차에 관계없이 말이다.
당시 발라끼레프도 사샤의 진보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면서 그와
연주도 많이 하고 토론도 자주 하면서 자신에게 감응하는
젊은이에게 확실히 가까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들의 관계는 점차 식어가서
싸늘해졌고, 그들 사이의 친밀감도 휘산되어 마침내 완전히 깨져
버렸다..."

 

-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 "나의 음악적 생애" 중에서...

 


위의 글은 글라주노프가 처음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가 차츰 우정을 나누는 사이까지 발전하는 소회를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자서전인 "나의 음악적 생애" 
중에서 뽑아본 내용이다.
그리고 그의 교향곡 1번이 림스키 코르사코프와의 학습의 결과로
나오게 되었고, 아직은 그에게 관심이 많았던 발라끼레프가 이를
초연해주면서 글라주노프는 "김나지움 제복을 입은" 학생
작곡가로 일약 러시아 전역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러시아 음악계에는 상당한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발라끼레프와 적대시하던 안똔 루빈쉬쩨인의 모스끄바 음악원에서
그의 수제자인 차이꼬프스끼가 처음으로 상뜨 뻬쩨르부르그로 와서
"5인조" 로 일컬어지는 "힘찬 소수" 그룹과 교류관계를 트게 되었고,
특히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그와 친구가 되었으며,
이후 모스끄바로의 여행을 통하여 모스끄바 음악원의 서구 지향적
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음악을 접하면서 이론적인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은 "힘찬 소수" 의 대장이었던 발라끼레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무소르그스끼가 죽고
발라끼레프가 성 뻬쩨르부르그의 자유 음악학교 교장직을 내놓고
은둔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점차 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고,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그를 대신하여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후 발라끼레프가 다시 복귀를 하지만, 이미 지나치게 민족주의
적인 것에 집착하는 그와 서구적 음악 이론의 베이스의
필요성을 어느정도 느끼면서 전문 음악성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관계는 서서히 벌어져만 가게 된다.

 

1881년부터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일단의
음악 그룹은 그의 집에서 자주 모이게 된다.
여기에는 그 계기를 마련해 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펠릭스 블루멘펠리뜨(Феликс Блуменфельт) 이외에
알렉산드르 보로진, 아나똘리 랴도프, 블라지미르 스따소프,
미하일 이뽈리또프-이바노프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가 속해 있다.

 

이들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글이 "나의 음악적 생애" 에 기록되어 있다.

 

"...뀨이는 거의 우리 모임을 찾아 오지 않았으며, 전적으로 혼자였다.
발라끼레프는 드문드문 찾아왔다.
그가 오면 어떤 것을 연주하다가 빨리 가버렸다.
그가 떠나면 모두들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활기찬 대화가 시작되고 새롭거나 최근 경향의 작품들이
연주되는 등..."

 

이제 한때는 러시아 음악 전통의 한 축을 차지하던 "5인조" 의
단단한 결속력은 서서히 무너지고 새로운 흐름과 전문성으로 무장한
신세대와 결탁한 새로운 그룹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이렇게
만들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절대적인 새로운
러시아 음악 전통의 후원자가 되었던,
미뜨로판 뻬뜨로비치 벨랴예프(Митрофан Петрович Беляев)란 인물
이었다.

 

1882년 갈채와 환호 속에 연주되었던 글라주노프의 1번 교향곡 초연
연주장에는 부유한 목재상 한 사람이 앉아 있었으며, 리허설 전에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발라끼레프, 그리고 글라주노프는 이 키가 크고
음악에 열정적인 관심을 보이는 그를 소개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글라주노프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이 문화적인 투자를
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우선 자유 음악 학교의
교장이자 중심 인물이었던 발라끼레프에게 원조를 약속한다.
발라끼레프는 이때 자신들 이전의 러시아 작곡가들 작품의 연주와
출판을 반대하였고, 오히려 서구의 여러 작곡가들의 유명 음악을
러시아에 소개하기를 바랬는데, 이러한 것은 러시아의 음악을 외국에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아울러 새로운 러시아의 젊은 인재들을
발국하는데 치중하고자 투자를 생각했던 벨랴예프와는 의견이 전혀
맞지 않는다.

 

벨랴예프는 먼저 계기가 되었던 글라주노프의 전 작품을 자신이
러시아와 서유럽에 설립하는 출판사를 통하여 출간하고 동시에
실력있는 젊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도 출판해주면서 이들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1884년에 글라주노프를 데리고 서유럽으로의 여행길에
올라 먼저 바이마르(Weimar)로 가서 글라주노프가 존경해 마지 않던
리스트를 만나도록 해줍니다.

 

리스트는 이미 글라주노프의 이름과 재능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따뜻이
맞아해주었고, 그를 위하여 조언과 연주를 해준다.
그리고 그의 교향곡 1번을 바이마르에서 연주되도록 주선해 준다.

 

이제 러시아를 떠나 국제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든든한 후원자까지도 얻게 된 글라주노프 -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
와도 같은 것이었다.
발라끼레프가 자신의 수제자로 여기던
세르게이 랴뿌노프(Сергей Ляпунов) 등과 더불어
"화요일의 음악회" 를 열던 것에 대하여 벨랴예프의 집에는
글라주노프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그룹들이 모여 진취적이고
젊음의 패기 가득한 음악 연주와 토론을 벌이는 자리가 만들어
졌으며, 이를 가리켜 "벨랴예프의 금요일" 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이 곡의 첫 시작부분이자 전악장에 걸쳐 지배하는 주제인
강렬하고 동양적 계면조에 가까운 선율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 주제는 보로진의 교향곡 2번 첫 주제를 생각나게
하는데, 실제로 글라주노프는 보로진의 영향을 분명히 받은
것으로 하고 있으며, 표현방식도 둘 다 똑같이 금관의 유니즌으로
연주되면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곧바로 마음 속에 깊은 각인을
새겨넣고 있다.

 

다만, 둘의 다른 점을 들자면 보로진의 경우에는 악장이 바뀌면서
서로 다른 주제를 쓰고 있는데 비하여 글라주노프는 순환주제인양
이 주제를 각 악장마다 조를 바꾸고 분위기를 바꾸어 계속 회상하게
해주고 있다.

 

또한, 1번 교향곡에서는 각 악장마다 다양한 주제를 모두 민속적인
것으로 하여 전반적으로 "흘러넘치도록"  풍성한 민속적 향연을
벌이고 있는 반면, 2번에서는 통일되고 좀 더 단순한, 직설적인
접근법을 시도하여 전 악장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작곡가들이라면 최소한 20대 중반 이후라야 가능할
만큼 뛰어난 조성감과 완벽한 화성적 이해력, 그리고 형식미와
선율적인 뛰어남이 돋보이는 21세의 천재 작곡가가 쓴 이 곡은
"프란츠 리스트를 추억하며"  씌여졌다.

 

다시 돌아가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사사받던 시절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더 하려한다.

 

1879년부터 1881년까지 체계적인 음악 수업을 림스키 코르사코프
에게 받은 그는 몇 곡의 피아노 소품들과 가곡들을 쓴 다음,
드디어 본격적인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교향악으로서,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고수하며
가지고 간 첫 번째의 것이다.
다른 5인조의 뛰어난 선배, 혹은 스승이 한 곡의 교향곡을 쓰기
위하여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을 하였던 것과는 달리, 그는 16세가
되던 1881년에 다소 미흡한 오케스트레이션 부분이 있긴 하지만,
놀라운 음악적 재능의 소유자임을 처음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알리게 되는 교향곡 1번을 완성하여 내놓게 된다.

 

이 총보는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통해 발라끼레프와 스따쏘프 등
"힘찬 소수" 들에게도 보여졌고, 그들에게 엄청난 찬사를 받으면서
검증을 거친 다음, 마침내 1882년 3월 13일의 공개 연주회에서
발라끼레프가 직접 지휘하여 일반인들에게 소개되었다.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미지의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청중들
모두는 전 4악장의 질풍과도 같은 충격파를 겪고서 모두들 엄청난
찬사와 환호로 이 곡을 환영해주었다.

 

러시아 민족주의 유파에 경도해있던 이들도, 독일 정통 음악에 경도
해있던 이들도 모두 상당한 환호로서 이 뛰어난 작품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각 악장이 전해주는 신선함과 소리의
향연만은 아니었다.

 

이 초연에 참석하였던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자서전인
"나의 음악적 생애" 와 다른 글에서 그때 그날의 분위기를 대단히
상세히 적어 알려주고 있다.

 

"...러시아의 젊은 작곡가들과 음악가들, 그리고 청중들 대다수는
들떠서 많은 박수갈채를 보내었다.
하지만 블라지미르 스따소프는 명백히 서구(독일)의 형태를 가진
것이라고 하며 조금 투덜대고 있었다.

 

청중들이 환호와 갈채를 보낸 것은 이 새로운 음악이 주는 신선한
충격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곧 밝혀지게 되었다.
청중들에게 답례로서 인사를 하러 나온 작곡가는 바로 다름아닌,
아직 학생복을 입고 있는 16세의 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청중들은 모두 더 큰 환호와 박수로서 그를 따뜻이 맞아주었고,
이윽고 모두들 기립하여 환호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연주회가 마쳐지고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헌정된 이 교향곡에
대하여 다른 암시를 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유한 글라주노프의 부모가 이 교향곡을 작곡하기 위하여
다른 작곡가를 고용하였을 거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글라주노프의 뒤이은 창작물들은 이러한 근거없는 루머를
빠른 시간 내에 잠재우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우리가 또한 사람의 음악적 천재라고 일컬을 수 있는 드미뜨리
쇼스따꼬비치의 첫 교향곡도 19세가 되어 나왔으며, 다른 뛰어난
러시아의 작곡가들도 20세가 지나서야 비로소
첫 교향곡을 쓸 수 있었던 만큼, 글라주노프의 음악적 재능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습작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질 수 없을 만큼 충실하고 꽉 찬
관현악법이나 작곡 기법, 그리고 음악적 영감까지...
어쨌거나 글라주노프는 이1번 교향곡의 공개초연 이후 러시아를
짊어지고 갈 한 거목으로서 주목받게 되었으며, 스따소프 마저도
"우리들의 작은 글린까" 라는 말로서 그에 대한 크나큰 기대감을
걸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는 소위 "5인조" 는 끝까지 한 그룹으로
러시아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음악을 주창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앞서의 글들에서 밝힌 것처럼, 밀리 발라끼레프가 이끄는 원래의
민족주의적 음악가 그룹과, 림스끼-꼬르사꼬프와 보로진 등의 젊은
그룹들을 중심으로 후원자 미뜨로판 벨랴예프의 집에 모여
러시아적인 것을 좀 더 뛰어난 기법으로 서구 본류의 음악에
접목시켜 새로운 러시아 음악 전통을 만들어가던 그룹으로 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나뉨의 시작이자 또한 그들 양쪽의 균형추를 잡아
새로운 러시아 음악의 전통을 완성하면서 이를 다음 세대의 러시아
작곡가들에게 물려준 이가 바로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였다.

 

그를 발탁해준 발라끼레프, 그리고 기초를 가르쳐준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말해주듯 그의 20대까지의 음악 속에는
러시아 민요와 민속적 소재들이 풍성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나,
어느새 이것은 그의 개성적인 발전을 위한 하나의 제약이 되어
있었고, 그러한 틀속에서 그를 다른 시각의 세상으로 인도해 준
차이꼬프스끼를 만나 껍질을 벗고 비로소 "글라주노프의 음악"
으로 꽃피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가 30대에 거의 이르른 시점
이었다.

 

그가 교향곡 3번을 쓴 것이 1890년이었고, 여전히 러시아적인,
"봄" 을 소재로 한 음악적 회화를 쓴 것이 1891년이었지만, 이후의
음악은 많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는 "춤" 을 중심으로 한 곡들을 계속 쓰기 시작했고, 이는 피아노를
위한 "작은 월츠(Petit valse)'작품 36",
"연주회용 대 월츠(Grand Concert-waltz) 내림마 장조 작품 41",
"세 개의 소품(피아노용) 작품 42번"(이 속에는 폴카와 월츠가 있다)
이외에도 바로 다음 번호인 살롱풍의 월츠(Valse de salon) 작품
43번 등으로 이어져 내려가다가 처음으로 정식의 발레를 위한 음악이
되는 발레 모음곡 "Chopiniana 작품 46번" 을 1893년에 쓰게 된다.

 

이미 러시아 음악과 문화계의 한 핵으로 자리잡고 있던 글라주노프는
보로진의 오페라 "이고리 공" 을 완성시키는데 일조하였고,
또한 그의 스승이었던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오페라 무대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너무나도 판이하게 이 장르의 음악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점차 빠져들어갔던 분야가 바로 "춤곡" 이었는데, 이에는
몇 가지의 배경이 있다.

 

그 첫번째는 바로 차이꼬프스끼의 영향이다.
차이꼬프스끼 역시 피아노 음악으로부터 발레, 심지어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선율성이 대단히 강한 "춤곡" 들과
이러한 요소를 지닌 음악들을 써내려갔고, 그로부터 바로 두번째
요소인 자신의 가장 단점이라고 지적되는
"선율선보다는 구조적 조성" 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글라주노프가 배운 것이 바로 "춤곡" 들을 많이 써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무대와 연결된 "발레" 음악들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음악 속에 등장하는 "춤곡" 의
요소들은 그의 마지막 낭만주의적 서정미와 심지어 서사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선율들을 지배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그의 수제자가 되었던 "드미뜨리 쇼스따꼬비치"
도 자신의 자서전인 "증언" 에서 언급을 하고 있다.

 

"글라주노프는 언제나 발레와 더 나아가서는 춤곡들의 작곡은
여러분들의 기교를 발전시켜 주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가 옳았다..."
발레 모음곡인 "Chopiniana" 를 써서 당대의 대 안무가였던
미하일 포낀(Михайл Фокин)에 의해 무대에 성공적으로 올려진 이후,
그는 연이어 연주회용 월츠 1,2번을 써내려갔고, 바로 그때 교향곡
4번이 나오게 된다.

 

글라주노프의 자의에 의한 새로운 시도로, 이 교향곡 4번은 처음으로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완전히 바래 버리고 글라주노프만의 서정성과
선율성이 그만의 이미 구축되어진 조성감과 대위법같은 기교를
이용하여 울려퍼지는, 3악장 구성의 독특한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게
된다.

 

드디어 글라주노프는 견습의 시대를 벗어나 개성의 시대를 열면서
한 단계 발전한 모습으로 자신의 음악을 선보이게 되었고, 이러한
자신감은 1894년에 내놓은 자신만의 발레 음악인
"발레의 장면(Scene de Ballet)작품 52번" 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비교적 자주 연주되는 그의 교향시
"어둠에서 광휘로(От мрака к свету) 작품 53"번에서도 앞서의
"스�까 라진" 이나 "끄렘린",  "봄" 같은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껴안고 있던 민요나 민속적 소재들이 빠져나가고 독창적인
선율선과 전개 수법을 보여주면서 앞으로 펼쳐질 30대의 작품
세계를 미리 예고해주고 있다.

 

이제 자신만의 음악적 세계를 드디어 발견하고 펼치게 된
글라주노프는 그의 110곡이 넘는 전작 가운데 20대까지의 작품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
3,40대에 거의 다 쓰게 된다.

 

특히 교향곡 5번을 쓰고서 작곡된 발레 대작인 "라이몬다
(Раймонда) 작품 57번" 을 비롯한 발레 "사랑의 계략
(Les Ruses de l'Amour)작품 61" 과 발레 "사계 작품 67" 등의
그의 대표작들과 "교향곡 6번 다 단조 작품 58번",  완성도 높은
 "현악 4중주곡 4번 가단조 작품 64번" 등을 줄줄이 내놓게 된다.
또한 30대에는 그의 또다른 하나의 이력인 교사로서의 경력도
시작되었다.

 

1899년 글라주노프는 성 뻬쩨르부르그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위촉을 받아 기나긴 이 방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당시 이 음악원은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가장 중심적인 인물
이었으며, 그는 또한 글라주노프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제 많이 정리도 되었고,
차이꼬프스끼에게 경도된 글라주노프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이전처럼 절대적인 존경심을 나타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훗날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부인은 글라주노프가
차이꼬프스끼와 브람스를 존경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실제로 글라주노프는 차이꼬프스끼와 그의 제자였던 따네예프,
그리고 절대적인 서구취향의 음악 옹호자이자 비평가였던
앙리 라로슈(Henry Laroche) 등과 교우 내지는 영향력을
주고받는 관계에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여전히 글라주노프를 친하게 대해
주었고,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차이꼬프스끼가 경쟁적 동반자로서의
친교 관계를 가지고 있던 점은 글라주노프가 두 거장의 틈사이에서
새로운 러시아 음악 전통을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분명한
것이며, 이러한 것은 그가 교직을 맡아 제자들을 길러내기 시작하면서
후대에 전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번 교향곡은 러시아에서는 "영웅적" 인 교향곡으로 불리워진.
그것은 이제 자신만의 음악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글라주노프가 마치 자신감을 내보이면서 강한 의지, 혹은 삶의
단언 같은 것들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1895년 완성되어 세르게이 따네예프에게 헌정된 이 교향곡은
1896년 5월 뻬뜨로그라드 신 러시아 악파 연주회에서 초연
되었으며, 4번에 이어 완전히 음악적
성인으로서의 글라주노프의 독립적으로 변화하고 발전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교향곡으로 알려져 있다.

글라주노프 교향곡 6번 Symphony No.6 - III. Intermezzo Allegretto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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