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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리스트 |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1945-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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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상한나라 작성일16-02-12 13: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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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첼로 연주가.

재클린 뒤 프레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여류 첼리스트였다.
뒤 프레 이전과 이후를 살펴봤을 때 그 누구도 그녀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활발한 활동을 펼친 여류 첼리스트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여느 예술가들처럼 자신의 훌륭한 재능을 맘껏 뽐내며 영광의 세월만을 살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모두에게 사랑과 환호를 받았던 영광의 시간만큼 불치병에 걸려 외로움과 고통 속에 신음했던 세월도 길었다.
영광과 좌절,사랑과 배신이 교차하는 눈물겨운 삶을 살았던 그녀,재클린 뒤 프레.
언제 들어도 가슴 찡한 그녀는 짧았던 환희와 긴 세월의 고통스런 외로움을 홀로 견디며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 사라져 간 한 떨기 아름다운 영국의 장미였다.

 

...연분홍색 꽃잎은 금방이라도 이슬 한 방울 뚝 떨어뜨릴 것처럼 처연하다.
42세에 요절한 영국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1945~1987)의 이름을 붙인 장미꽃 품종은 주인공처럼 연약하고 아름답다.

천재 연주자였던 뒤 프레는 28세에 희귀병인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제대로 음악 인생을 꽃피우지 못했다.
손가락이 굳어버리고 눈이 침침해지며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는 병이었다.
그는 활을 떨어뜨리는 실수를 자주해 얼마 후 연주를 중단했다.

병마에 찌들기 전 그는 천진하고 밝은 첼리스트였다.
옥스퍼드대 교수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를 둔 명문가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했다.
4세에 첼로를 시작해 거장 파블로 카잘스와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배우며 세계 무대를 휘어잡았다.

그는 한창 눈부신 나이인 23세 때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대니얼 바렌보임을 만났다.
지나치게 야심이 넘치는 바렌보임을 못마땅하게 여긴 뒤 프레 부모의 반대가 심했지만 결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바렌보임은 아내의 명성을 이용해 출세 가도를 달렸다.
자신의 음악회에 뒤 프레를 협연자로 등장시켜 청중을 열광시켰다.
아내가 병에 걸린 줄 몰랐던 그는 음 하나만 놓쳐도 몹시 화를 냈다.
뒤 프레가 고통을 호소하면 정신력이 해이해진 것이라고 다그쳤다.
나중에 희귀병임이 판명나자 뒤 프레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자신의 연주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육체적 문제였음이 드러나자 죄책감에서 벗어난 것.

하지만 연주를 그만둔 후 삶은 더 비참했다.
해외 순회 공연으로 바쁜 바렌보임은 그를 챙기지 않았다.
뒤 프레는 몸의 고통보다 외로움과 싸우는 게 더 힘들었다.

병상을 쓸쓸하게 지키다 간 비운의 첼리스트를 기리는 클래식 곡이 있다.
바로 '재클린의 눈물'. 독일에서 태어난 프랑스 작곡가이자 첼리스트 오펜바흐(1819~1880)의 작품이다.
뒤 프레의 불행한 일생을 닮은 이 곡은 선율이 끊어질 것처럼 슬프다.
묵직한 저음 위로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애잔한 선율이 여리고 세차게 흐른다.

 국내 드라마에도 삽입된 이 선율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소품으로 꼽힌다...

                                                                                            .... 전지현 기자의 글 중에서....

 

재클린 뒤 프레는 1945년 영국 옥스퍼드의 음악을 사랑하는 중산층 가정,옥스퍼드 대학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3살 때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소리 가운데,특히 첼로음을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졸랐다고 한다.

4살때 자기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받고 5살때 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한 그녀는 런던의 첼로스쿨에서 W.프리스에게 사사했고,뒤에 스위스의 체르마트에서 해마다 개강되고 있던 파블로 카잘스의 마스터 클라스에서 기초를 다졌다.
 1962년 런던에서 데뷔,1965년 BBC 교향악단의 미국 연주여행에 독주자로 동행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이름을 떨쳤다.
1966년에는 소련의 명 첼리스트 M.로스트로포비치의 가르침을 받고,영국을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완벽할 정도의 기교와 풍부한 음악성을 지닌 그녀의 연주는 매우 스케일이 크고 당당했다.

 

재클린이 본격적으로 연주활동을 시작한 때는 1965년,그녀의 나이 20세때 부터였다.
고국인 영국을 넘어 세계적인 첼로의 스타가 되어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23세에 또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결혼이었다.
음악적 재능이 무척 뛰어난 장래가 촉망되는 유태계 피아니스트였던 바렌보임은 성공을 위한 불 같은 열정,그리고 야심만만한 젊은이였다.
바렌보임과 사랑에 빠지게 된 재클린은 유태교로 개종하였고 전쟁 중인 이스라엘에서 결혼식까지 서둘러 해치웠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다.
재능은 뛰어나지만 배경도 별 볼 일 없었고 유태인 출신인 바렌보임과의 결혼은 재클린의 집안에서는 물론 극구 반대하였다.
그러나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연주여행을 다녔고,이들의 공연은 성공을  거듭하였다.
재클린은 그녀 자신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 더해 바렌보임에게도 많은 영감을 얻으며 음악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었고,바렌보임은 이미 세계적인 스타가 된 재클린과 함께 할 수 있었기에 거침없이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바렌보임의 성공을 향한 끝없는 야망과 음악적 열정은 재클린을 무척 힘들게 하였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뒤 프레는 우울증까지 걸려 상습적으로 약을 복용하기도 했고,그런 그녀를 바렌보임은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해서 재클린은 언니인 힐러리에게 울며 살려달라고 전화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한 순간,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시련과 불행이 재클린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중경화증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병마가 그녀를 엄습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재클린은 1971년부터 다중경화증이라는 병에 걸려 신음하기 시작하였고,1972년가을부터 병상에 누워지내야 했다.
다중경화증,온 몸이 천천히 마비되어 제대로 걸을 수도 없고 팔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이 무서운 병은 섬세함을 생명으로 하는 연주가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금새 회복될 것이라 믿었던  이 무서운 병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27세 였으며,성공을 향해 한창 앞을 달려야만 하는 아까운 나이였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고통속에서 신음했던 그녀를 더욱 처절하게 만든 것은 연주를 할 수 없다는 좌절과 절망뿐이 아니었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그녀 곁을 떠난 처절한 외로움과의 싸움,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잊혀져 간다는 두려움이었다.
이제 그녀를 간호하며 옆에서 지키는 사람은 오로지 그녀의 가족뿐이었고,그토록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남편 바렌보임은 열심히 출세가도를 달리며 전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딴 살림까지 차리고 있었다.

재클린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항상 병상에 누워서 지내야 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 모두를 잃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자신은 연주를 할 수 없었지만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고,그 공로를 인정 받아 1978년 솔포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전신마비의 증상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게 만들었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기구를 이용하여 눈꺼풀을 억지로 벌려야 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침대 위에서 숨만 쉬는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다.

 

1987년 가을.

그녀가 병마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산지 어언 15년이 지난 해였다.
가을의 찬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 재클린은 폐렴에 걸리게 되었다.

10월 19일에 재클린은 의식을 잃었고 더 이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녀가 의식을 잃게 되자 언니 힐러리는 바렌보임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파리에서 피아니스트와 딴 살림을 차리고 있던 바렌보임은 황급히 달려왔고 재클린은 바렌보임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42세. 영국을 넘어 전 세계 음악팬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여류 첼리스트의 삶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재클린 뒤 프레는 42년을 살았다.
짧다면 짧은 42년의 시간을 약 14년씩 3등분 할 수 있는데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시간이 3분의 1,그리고 어린 시절에 데뷔하여 사랑과 성공을 모두 누릴 수 있었던 영광의 시간이 또 3분의 1이라면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희귀한 병에 걸려 죽음을 향해 달려간 불행한 시간이 또 3분의 1이다.

바렌보임은 뒤 프레 사후에 그녀의 무덤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

 언니 힐러리는 회고록에서 자신도 다니엘을 무척 증오했지만 재클린이 사망한 후 보여주었던 그의 태도에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고 했다.
결국 다니엘과 재클린은 서로를 너무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고 각자 너무 다른 성격을 갖고 있어서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재클린은 어린 시절에 이미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예로 언니 힐러리는 어린 시절 재클린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언니. 비밀 하나 말해줄까?]...
...[비밀? 뭔데?]...
...[난…어른이 되면 전신마비에 걸릴 것 같아. 그럴 것 같아. 이거 엄마한테는 말하지마]...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천재적 재능과 그 재능으로 인한 성공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것이란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찌보면 참 오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재클린 뒤 프레의 연주활동은 약 6년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다양한 곡을 연주하며 많은 음반을 남겼다.
우선 하이든,보케리니,슈만,생상스,드보르작,엘가 등의 굵직한 첼로 협주곡은 모두 녹음하였다.
특히 첼로 협주곡의 왕이라 불리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은 바렌보임과 함께 녹음한 것과 첼리비다케와 함께 한 것도 있는데,둘 다 명연 중의 명연으로 꼽힌다.

음악사적으로 그녀가 남긴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발굴,연주한 것이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과 함께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이 곡은 뒤 프레가 등장하기 전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곡이었으나 같은 영국 출신의 작곡가인 엘가의 곡을 무척 사랑한 뒤 프레 덕분에 세상에 알려져 명실공히 최고의 첼로 협주곡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좋아하는 이들은 뒤 프레의 음반을 0순위로 선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뒤 프레가 남긴 음반은 협주곡만이 아니다.
실내악,독주곡 쪽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다니엘 바렌보임이 피아노 반주를 맡은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좋은 평가를 받는 명반들이다.

뒤 프레의 연주는 항상 힘이 넘치고 강렬했다.
언제나 현이 끊어질 듯한 강렬한 연주를 선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공연무대는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감과 정열이 넘쳤다고 한다.
그녀가 연주하는 모습을 영상자료로 보고 있으면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힘차게 활을 긋는 신들린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머리를 단정하게 묶지 않고 생머리를 휘날리는 야성적인 모습이 때론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첼로를 배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음악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여자.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했고,그 남자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아야 했던 비운의 첼리스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희귀병에 걸려 인생의 3분의 1을 병상에 누워 신음하며 처절한 고독과 싸워야 했던 그녀 재클린 뒤 프레.
그녀가 떠난지 벌써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그녀를 기억한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처절한 심정으로 작곡했다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의 그 슬픈 선율이 흐를 때마다,또한 그녀를 우리는 기억한다.
비록 그녀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떠났지만 그녀는 20세기의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운명을 간직한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영국의 장미였음을 우리들은 기억한다.

 

*.앨범

 1.Sir Edward Elgar - Cello Concerto in E minor, Op. 85  
   BBC Symphony Orchestra,
   Sir John Barbirolli, Conductor,
   Jacqueline du Pre, C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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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Elgar - Cello Concerto; Sea Pictures; Cockaigne Overture

  London Symphony Orchestra, Orchestra,
  Philharmonia Orchestra of London, Orchestra,
  John Barbirolli, Conductor,
  Jacqueline du Pré, Cello,
  Janet Baker, Mezzo-sopr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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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Elgar - Pomp and Circumstance Cello Concerto Enigma Variations
  Philadelphia Orchestra, Orchestra,
  Daniel Barenboim, Conductor,
  Jacqueline du Pre, C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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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cqueline Du Pré and Daniel Barenbo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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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John Barbirolli and Jacqueline Du Pré during the recording of the Elgar Concerto in Kingsway Hall,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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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chas Zuckerman, Daniel Barenboim and Jacqueline Du Pré at a recording session for the Beethoven Piano Tri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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