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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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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상한나라 작성일16-02-08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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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Ashkenazy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피아니스트, 지휘자 (1937 ∼ )

 

- 출생지 : 러시아 고르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Vladimir Ashkenazy)는 1937년 7월6일 모스크바 서쪽 고르키라는 도시에서 유태인 피아니스트의 아버지 슬하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전문 실내악 피아니스트, 즉 앙상블 피아니스트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아쉬케나지는 7세 때에는 학생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하이든의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로 천부적인 음악적 기질을 발휘하였다.

 

초창기 그의 피아노 레퍼토리는 전통적인 곡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후에 프랑스 작곡가, 특히 러시아 작곡가들의 곡도 섭렵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가 밝고 가벼운 곡만을 연주하는 즐기기 위한 음악을 만드는 피아니스트였던 것에 반해 아쉬케나지는 무엇을 연주하든 훌륭한 연주를 들려준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다양하고 폭 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해내었는데,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 만큼 서로 다른 두 작곡가의 곡을 그토록 완벽하게 마스터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는 찾을 수 없다는 평을 얻고 있다.

 

1940년 아쉬케나지와 그의 가족은 고르키에서 모스크바로 이사하는데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으나 그를 위한 음악 교육적 환경만은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그의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성장은 9세 때부터 출발하는데 그가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의 중앙음악학교(Central School of Music)에 입학하면서 부터이다. 1955년 18세 때 음악학교를 졸업한 아쉬케나지는 같은 해 바르샤바 쇼팽 국제 콩쿠르(Warsaw Chopin Competition)에 나가 2위에 입상하였으며 모스크바 음악원(Moscow Conservatoire)에 입학하여 레프 오보린(Lev Oborin)의 피아노 수업에 참여하며 더욱 심도있는 음악교육을 받게 된다.

 

1956년 아쉬케나지는 처음으로 서방세계로 연주여행을 떠나게 되고 벨기에 브뤼셀의 라이네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Reine Elisabeth Competition)에서 1위로 우승하였으며 이로 인한 연주회에서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가 연주한 베토벤 후기 소나타에 열광한 언론은 아쉬케나지가 아니라 베토벤 자신에 의해 직접 연주된 것과 같은 사운드였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한 그는 위대한 연주자로서의 3가지 덕목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음악적 재능, 지적인 이해력, 완벽한 테크닉이다.

 

아쉬케나지는 1963년 모스크바 음악시절 만난 아이슬란드의 피아니스트 토룬 요한스도티어(Thorunn Johannsdottir)와 결혼한다. 이들 부부는 아들을 하나 낳은 후 영국으로 건너가 네 명의 아이들을 더 낳았고 그 중 두 명은 각기 피아노와 클라리넷 연주자가 되었다. 1968년부터 아이슬란드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해 온 그는 보다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위해 1974년 소련국적을 버리고 아이슬란드 국민이 된다.

 

1970년부터 그에게는 중요한 제2의 음악인생이 시작되는데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뿐 아니라 지휘자로서의 음악활동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 방대한 녹음작업과 전세계로의 연주여행을 통해 점차 그의 음악성을 서방에 알리게 된 아쉬케나지는 자신이 피아노 연주자 뿐 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새로운 음악세계에 빠져들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드디어 그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제 1 객원 지휘자),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음악 감독),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제 1 객원 지휘자), 베를린 독일 심포니 오케스트라(chief conductor 및 음악감독) 등에서 세계 최정상의 지휘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지휘자로서 활동하는 가운데에도 피아니스트로서의 연주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던 아쉬케나지는 라흐마니노프 전집을 레코딩하는 등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였는데 이제 그는 소문이 아닌 자신의 순수한 음악적 품위로 전세계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1998년 1월, 아쉬케나지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Czech Philharmonic Orchestra)의 chief conductor의 자리에 임용되어 오늘날까지 다양한 순회공연과 레코딩으로 할발한 음악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1999/2000 시즌에는 유럽, 일본, 북미와 남미 순회공연을 가진 바 있으며 2000/2001 시즌에는 런던, 비엔나, 루체른, 독일, 그리스 등 유럽 및 한국과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계획이다.

 

그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활동 외에 European Union Youth Orchestra의 음악감독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계관지휘자로도 일하고 있다. 아쉬케나지는 지휘자로서의 활동 외에도 유럽, 극동, 미국에서 피아노 독주회와 레코딩작업으로 자신의 끊일 줄 모르는 음악적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이 시대의 위대한 음악가임에 틀림없다.

 

 

 

 

 

# "지휘자"로서의 아쉬케나지

 

1975년경 본격적인 지휘활동을 시작한 아쉬케나지는 1977년 영국에서 정식으로 지휘자로 데뷔하는데 당시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해였다.

 

그의 지휘자로서의 주요 경력을 살펴보면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 로얄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음악감독,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 베를린 도이치 오케스트라 지휘자,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그 밖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및 보스톤 심포니, 그리고 런던 심포니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경력이 있다.

 

그의 지휘자로서의 음악적 기질에 대해 언론에서 '아쉬케나지가 최근 지휘를 시작한 것도 그의 음악적 요구가 이제 피아노의 표현력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는 필연적인 요인이 있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에게는 지휘자로서도 성공할 만한 반사신경의 날카로움이나 음색에 대한 감각, 단원을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음악적인 설득력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호평을 할 정도로 지휘자로서의 아쉬케나지는 그 출발부터 그의 천부적인 기질을 인정받았다.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의 변신에 대해 아쉬케나지 자신은 '나는 항상 오케스트라는 신비하다고 생각.....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악기를 연주하는데 대한 분별력 있는 태도가 개발되었다. 어떤 점에서 나는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것을 즐기기 시작했고 또한 나는 그런 것들이 다소 다르게 연주되어 들린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오케스트라 앞의 지휘대에 서려고 하는 억제된 욕망 때문이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방식으로 어떤 음악을 연주하게끔 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지휘에 있어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닌 그 이상의 것임을 일찌기 알고 있었던 아쉬케나지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의 정신과 마음이 어떤 것을 갖고 있다면 훌륭한 테크닉 없이도 음악을 만들 수 있다'라고 믿었으며 실제로 그는 청중을 감동시키고 음악에 영감을 불러 넣어주는 타고난 능력에다 날카롭고 분석적인 두뇌를 가진 깊이 있고 조심스러운 음악가라고 평가 받고 있다. 그리하여 영국비평가들은 그를 "음악 사상가"라고 말할 정도이다.

 

아쉬케나지가 지휘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기는 것은 지휘자가 그 음악의 작곡자와 어떻게 의사소통 할 것이냐 인데 그는 아마도 이러한 선천적 재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뒤늦게 시작한 지휘자의 길을 감에 있어서도 그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만의 해석과 감성으로 독창적인 지휘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악보를 연구하는 데서가 아닌 바로 지휘를 함으로서 그러한 음악적 해석이 가능해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 "피아니스트"로서의 아쉬케나지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의 음악교육에 따라 6세 때부터 피아노 수업을 시작하여 온 아쉬케나지는 1955년 18세 때 국제 쇼팽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하면서부터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956년부터 시작된 서방으로의 연주여행은 그를 언제나 신선한 이미지를 주는 피아니스트이며, 항상 청중이 크게 기대하는 연주가라는 평을 받게 하였다. 연주를 함에 있어 그의 지향적인 규범은 자신의 감정을 살리는 동시에 선천적인 날카로운 평형감각을 음악적 조형에 적용하는 데에 있다. 그의 연주법은 소련의 명교수들이 창조한 합리적인 방법을 자신에 맞게 완전히 소화해내었다고 볼 수 있다. 유난히 작은 체구의 아쉬케나지는 자신의 큰 손으로 전신을 강한 스프링과 같이 움직이며 손 끝에 전신의 중량을 얹은 듯 정확한 기술과 감성으로 작품을 연주해낸다.

 

자신의 연주기법에 대한 아쉬케나지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허식을 제거하는 것이다. 베토벤이나 모짜르트의 핵심을 잡고 거기에 숨겨져 있는 고유의 간결성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의 연주에 감명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찬사는 그의 연주가 매우 유연하며 천부적 예술가의 기질로 생명이 약동하는 신선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그의 연주는 바흐로부터 프로코피에프에 이르는 다양한 레퍼토리로 최근의 연주는 인간적 성숙까지도 반영하는 깊은 정서적 표현을 가능케 해내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아쉬케나지는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위해 고국인 러시아를 떠났고 아픈 희생을 치른 만큼 독자적 연주양식을 확립해내었다. 실제로 그는 지적인 구성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과 병행하여 감정을 더욱 대담하게 표현해 왔는데, 그러면서도 음악적 순수성에서 멀어지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예술가가 만족했을 때 그 예술적 생명은 끝이 난다고 믿고 있는 그는 요즈음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성을 보이며 누구보다도 예술가로서의 여정을 지속시켜 나가리라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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