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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 마우리치오 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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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상한나라 작성일16-02-08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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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January 5,1942 -     )

 

 

 

이탈리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연주를 들려주는 인물로 꼽히는 피아니스트인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미켈란젤리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피아니스트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이탈리아 피아니스트로 비르투오조의 기량과 다양하고 대담한 레퍼토리는 마우리치오 폴리니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는 일찍이 그의 이러한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여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57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한 그는 어린 나이에 그의 재능을 여실히 증명시켰다.

 

이후 1959년 밀라노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다음해,에토르 포촐리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또한 1960년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에서 심사 위원 전원 일치로 1위 입상자가 되었다.

 

이 때 심사 위원장이었던 루빈스타인은 “여기 심사위원 중에서 그 만큼 잘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이 시기 그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EMI에서 녹음했는데,이 음반은 시적임과 동시에 정밀함의 극치였다고 평가 되고 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1942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는 건축가였는데 이런 환경속에서 폴리니는 5살때 카를로 로나티(Carlo Lonati),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카를로 비두쏘(Carlo Vidusso) 등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1953년 밀라노에서 처음으로 공개 연주회를 가졌고 후에 밀라노 음악원(Milan Conservatory)에서 작곡과 지휘도 공부했다.

 

그후 여러 피아노 콩쿠르에서 입상한 폴리니는 잠시간의 연주활동 후 장기간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일체의 연주 활동을 중단한 채,계속적인 공부와 레퍼토리 개발을 위해 공개석상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8년 복귀한 후,그는 다시 한번 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곧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나갔다.

 

1968년 뉴욕 카네기 홀에 등장함으로써 미국 무대에 데뷔했다.

 

1974년에는 일본에도 데뷔했고 이후부터 범세계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폴리니는 보다 폭넓은 청중들에게 음악을 전달하려는 각별한 노력을 하였다.

 

그는 1970년대 초반,친구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비롯한 다른 이탈리아 출신 음악가들과 함께 밀라노의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일련의 연주회를 열어 이같은 새로운 청중들에게 고전 음악을 소개하고자 했다.

 

특히 폴리니는 학생 때부터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와 우정을 다지면서,그들은 제2빈악파의 음악,1960년대의 음렬주의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연주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음악의 이해자이기도 한 그는 일반적인 애호가들에게 새롭고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제공하려 노력했다.

 

광범위한 그의 레퍼토리는 바흐,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쇼팽,슈만,리스트,브람스 등의 스탠다드 작품은 물론 현대음악도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불레즈,슈톡하우젠,지아코모 만조니,루이지 노노 같은 현대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그의 현대음악 프로그램을 채우고 있다.

 

폴리니의 현대 음악에 대한 해석이 뛰어나다는 평가는 그가 이처럼 현대 음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연구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는 불레즈, 노노, 슈톡하우젠과 같은 작품에서 그의 음악 해석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현대음악에 대한 이러한 애정은 현대 음악에 생소한 많은 청중들에게 새로운 프로그램을 소개해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연주활동은 현대음악을 소개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고전음악에 대한 새로운 청중을 낳는 효과를 보이기도 했다.

 

 

 

폴리니는 완벽하고 현란한 테크니션을 구사하지만 때로는 감정적으로 다소 건조한 경향으로 비난 받기도 하였다.

 

그는 독일 그라모폰과 1971년부터 십년간 클래식 음반을 녹음했는데,여기에는 베토벤의 마지막 5개 소나타와 4개의 콘체르토,쇼팽의 에튜드,쇤베르크의 솔로 작품,슈만의 판타지,바르토크의 <협주곡 2번>,프로코피예프의 <소나타 7번>,불레즈의 <소나타 2번>,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르슈카>의 3개 악장이 있다.

 

특히스트라빈스키의 Three Movements from “Petrushka”와 프로코피에프의 7번 소나타는 20세기 역사적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이 음반의 해석은 모두 명료함,파워,그리고 지적인 밝음(intellectual lucidity)이 어우러져 있다.

 

이는 미켈란젤리(Michelangeli)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미켈란젤리는 폴리니와 몇 달 동안 함께 공부한 사이이다.

 

그는 이전 세대로부터 그들과 같은 감성을 이어왔는데,여기에는 박하우스, 피셔, 파스킬, 크로토(Cortot), 그리고 기제킹이 있으며,지휘자로는 카라얀,토스카니니,특히 미트로폴로스(Mitropoulos)가 있다.

 

1985년 바흐 평균율 1집을 레코딩 하였으며,1987년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이끄는 빈 필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녹음,

 

1993-1994년까지 베를린,뮌헨,뉴욕,밀라노,런던,빈에서 처음으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폴리니는 19세기와 20세기의 주요 레퍼토리도 이미 음반으로 선보였다.

 

협주곡은 카를 뵘과 모차르트,베토벤,브람스의 작품을,오이겐 요훔과 베토벤의 작품을,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브람스,바르톡,베토벤,슈만, 쇤베르크의 일련의 작품들을 녹음했다.

 

그의 음반 목록에서 또한 유명한 것으로는 쇤베르크의 <피아노 독주곡> 전곡,불레즈의 <소나타 제 2번>,베베른의 <변주곡 작품 27>을 비롯해 노노,만조니의 작품집 등이 있다.

 

그 후에 드뷔시의 <연습곡>,베르크의 <소나타 제 1번>,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휘로 베를린 필과 협연한 베토벤 협주곡 라이브 레코딩 등을 내놓았다.

 

1996년 저명한 Ernst von Siemens Music Prize를 수상하였으며,2001년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으로 디아파종상을 역시 수상했다. 2002년 60세 생일을 기념하여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13개 CD로 구성된 폴리니 에디션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쇼팽의 <전주곡집>을 연주한 명반을 꼽으라 할 때 알프레드 코르토의 왕년의 명반을 첫손가락에 두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코르토 명반의 녹음이 낡았고 게다가 모노음악이라는 결점을 감안한다면,오리지널 스테레오로서 최고의 명연주로 치는 것은 아무래도 폴리니를 들지 않을 수 없다.

 

1974년 7월에 녹음된 이 레코드는 폴리니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와 쇼팽을 녹음하기 시작하면서 제작한 것으로서,현대 최고의 쇼팽 연주자다운 관록과 시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특히 1960년 제6회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폴리니가 18살의 어린 나이로 참가하여 당당히 1위에 입상했을 때 세인들의 놀라움은 컸다.

 

그때 심사위원장이었던 루빈스타인이 극찬할 만큼 폴리니는 현란한 기교를 과시하면서 그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바 있다.

 

그러나 폴리니는 그로부터 10년간을 연주일선에 나타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내적인 성숙을 기다려 왔다.

 

그런 후 73년도부터 레코딩에 들어가 쇼팽을 필두로 착착 녹음을 진행시켜 가면서 "기교주의자"로서의 자신을 과감히 전환시켜,충분히 무르익은 피아니즘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폴리니는 칼 뵘이 살아 있을 당시 베토벤의 협주곡 전집을 5번부터 역으로 레코딩해 갈 때 뵘이 급서해 그 계획이 무산되어 버렸음을 지금도 몹시 아쉬워하고 있다.

 

폴리니는 쇼팽 위주의 연주에서 벗어나 현대곡까지를 레퍼터리로 확보해가면서 폭넓은 비약을 꾀한다.

 

그러나 아루트르 루빈스타인이 타계한 지금,폴리니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쇼팽 연주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신세대 피아니스트들의 잇따른 등장으로 바랜 감이 있지만 마우리치오 폴리니라는 이름은 여전히 음악애호가들에게 하나의 신화다.

 

쇼팽 콩쿠르에 우승하고서도 한동안 공식 무대에 나타나지 않고 칩거하며 수련을 계속한 점이나,괴팍하기로 소문난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미켈란젤리의 제자라는 점,국제 무대에 데뷔한 후 엉뚱하게도 물리학 공부를 시작한 점 등 그를 둘러싼 일화는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걸출한 테크닉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음악성을 지닌 피아니스트를 손꼽을 때 폴리니는 마르타 아르헤리치,머레이 페라이어 등과 함께 첫손에 드는 인물이다.

 

그런 폴리니가 처음으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음반을 냈다.

 

보통 피아니스트들은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집을 피아노의 구약성서,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신약성서라 부른다.

 

이토록 비중 있는 레퍼토리를 65세가 돼서야 녹음한 점이 의미심장하다.

 

칠순에 들어 비로소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집을 녹음하며 “온 힘을 다해 연주했다”고 토로한 로스트로포비치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음반에 담긴 곡은 ‘열정’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23번을 비롯해 22번, 24번, 27번 등 4곡.

 

폴리니는 이 음반을 시작으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이어 쇼팽 녹턴 전곡을 녹음할 계획이라고 한다.

 

폴리니 음악의 생명력은 터치에 있다.

 

그의 터치는 차가우면서도 빛이 나는 듯한,명료함의 극치를 이루는 음색을 자랑한다.
때문에 약간 냉정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음반에서는 그러한 차가움 대신 힘과 감성이 넘치는 연주를 들려준다.

 

그의 손끝에서 살아난 베토벤은 젊고 싱싱하다.

 

특히 베토벤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떠올리며 작곡했다는 ‘열정’ 소나타 1악장의 연주는 마치 거대한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듣는 이를 압도한다.

 

30대 시절에 이미 대가였던 이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 끝없이 성장하는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뿐이다.

 

 

 

<참고>

 

*.마우리치오 폴리니 인터뷰

 

 

 

폴리니는 인터뷰에서 믿기 어려울 만큼 과묵하다.

 

아니 거의 인터뷰를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1980년대 말 그는 예전보다 용이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연주는 불안전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어쨌든 그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생각에 대해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 것은 사실이다.

 

다음은 독일 페터스에서 풀찬된 ‘음악가의 대화’ 시리즈에 실린 폴리니의 인터뷰 일부이다.

 

여기서 그의 연주에 대한 애정과 끊임없이 노력하는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직접 연주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음악에 대한 길은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능한 많은 문헌을 알기 위하여,나는 아주 많은 작품을 나만을 위해서 계속 연주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씩 레퍼토리 속에 도입해 갈 때만다 조금은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중략)

 

물론 콘서트 전에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편이 대개의 경우 좋습니다.

 

저도 그런 날에는 가능한 오래 수면을 취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습 할 때에 생각했던 이것저것을 콘서트 전에 모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음악을 만든다는 것을 위해 완벽할 때까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오히려 저는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을 때에,설령 그것이 벌써 몇 백 번이나 쳤던 곡일지라도,그 음악 속에서 항상 무엇인가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대체로 콘서트 시작 바로 직전에 연주장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1악장  Allegro affettuoso a단조 4/4박자

제2악장  Andante grazioso F장조 2/4박자

제3악장  Allegro vivace A장조 3/4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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