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순 님 / 아무 것도 아닌 실금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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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상한나라 작성일16-04-30 15:56본문
나는 왜 그렇게 자주 금을 밟았을까
다른 아이들은 폴짝폴짝 잘도 뛰어넘고
깨금발 딛고도 사뿐사뿐 잘도 넘어가는데
아무 것도 아닌 검은 고무줄이
바닥에 그려 놓은 투박한 금이 왜 그리 두려웠을까
학교 문턱을 밟으면서 금 밟지 않는 것을 배웠다
정사각형 안에 넘치지 않고 한글을 채우는 일
책상에 그어진 금 너머 짝궁의 자리를 넘보지 않는 일
매번 정해진 자리에 앉고 정해진 자리에서 일어서는 일
출가외인出嫁外人이 된 언니들은
호적에 붉은 줄 긋고 제각기 남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딸들은 무덤에 가도 오르지 못할 박씨 집안 족보에
김씨, 이씨, 강씨, 정씨 성을 가진 남자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세상 모든 일들이 아주 작은 금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아무 것도 아닌 듯 보이는 실금들이
완강한 금기의 벽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벽을 넘어서지 못해
때로 허옇게 속이 터져
스스로 금이 가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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